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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이라는 듣기 좋은 말 - 네 번째 이야기

M
케투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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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무엇인지 이제는 똑똑히 알겠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더군요. 분명 조금 전까지 밥 잘먹고 행복했는데 영상 하나가 떠오릅니다. 일 때문에 정신없이 집중하다가 커피 생각이 나서 돌아 앉으면 또 떠오릅니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 때, 느닷없이 생각 하나가 떠오릅니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나의 소중한 아내가 얼굴도 잘 모르는 젊은 놈과 몸을 섞고 있습니다. 식은 땀이 흐릅니다. 이건 뭐 야동을 많이 봐서가 아니잖아요. '미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합니다. 분노, 수치심, 모멸감, 자괴감... 어떤 단어로도 그 절망과 당혹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건 상상이 아니에요. 엄연한 현실이지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같이 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내도 '여긴 내집'이라며, 미안하다며, 아이들과 살고 싶다며 같이 살 각오를 전해왔습니다. 제가 신은 아니지만 상간남은 확실히 정리된 듯 보였습니다. 이제 공은 제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이다. 가능하면 아이들을 생각하자.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요? 자는 사람 불러다 앉혀놓고 추궁도 하고 협박도 하고 고백도 하고 울어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참 한결같더군요. 미안하다, 잘못했다, 원하는대로 해주겠다.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짐도 샀습니다. 그날 온 가족이 모여 울음바다를 이뤘습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같이 살아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니까 또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런데요, 그게 끝이 아니더라구요. 사랑하려고 애써보았습니다. 코골이 때문에 각방을 쓴 지가 꽤 오래된 저희 부부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옆에도 누워보고, 사랑한다고도 말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아내가 목석이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웃고 떠들다가도 밤이면 슬픈 음악을 들으며 홀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합니다. 일상은 분명 예전처럼 흘러가는데 뭔가 큰 공허한 느낌 하나가 가시질 않습니다. 풀지 못한 매듭 하나를 찜찜하게 두고 집을 나서는 기분입니다.

 

톡을 보내면 몇 십 분이 지나서 겨우 확인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현타가 오더군요. 이거 지금 뭐하는 짓이지? 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쩔쩔 매고 있는 것인가? 왜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 것인가? 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소주 두 병을 깠습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아내에게 톡을 보냈습니다. 이해도 안되고, 용서도 안된다... 그제서야 아내가 톡으로 답을 하더군요. 집에 들어가면(아내는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얘기나 좀 하자고. 소주 두 병에 조개탕, 무교동 낚지를 먹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퍼부었습니다.


솔직히 한 번은 술 기운 때문에 실수했다고 치자, 두 번째는? 세 번째는? 그 다음은 무슨 생각으로 그 놈이랑 놀아난거냐 외로워서 그랬다고? 섹스가 고파서 그랬던건 아니고? 원빈보다 잘 생긴 젊은 놈을 만나러 가며 얼마나 행복했을까? 몸이 달아올랐을까? 그래도 아내는 묵묵부답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너 참 이기적이다, 잔인하다, 어떻게 그렇게 내 맘을 몰라줄 수 있냐? 뭘 해달라는게 아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이해해달라는 말이다. 공감해달라는 말이다. 그게 안된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갈라서는게 낫지 않느냐.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그런데 아내가 뭔가 알겠다는 눈치로 저를 바라보더군요.

 

어릴 때 양부모로부터 학대와 폭행을 당한 친구입니다. 그럴 때면 때리는 사람이 지칠 때까지 맞고만 있었대요. 그래서 '독한 년'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최근 2주가 그랬다고 했습니다. 제가 때리면 맞고, 내치면 쫓겨날 각오로 견뎠다고 합니다.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울더군요. 진짜 진짜 미안하다고 말하더군요. 이게 바로 어제, 아니 그저께 있었던 일입니다. (외도 카페에 글을 올리니) 진도도 속도도 빠르다고 칭찬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내 욕을 댓글로 해대니 그럴 줄 알았다며 비꼬는? 분도 계시더군요. 굳이 그런 반응에 에너지를 뺏기로 싶지 않아 글도 지우고 카페도 탈퇴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담하시는 분이 문자를 보내셨더군요. 그래요. 그깟 댓글이 무슨 대수라구요. 다만 상처받는 사람들끼리 2차 가해는 없었으면 해서 글을 지운겁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이 또 어디 가서 하소연이라도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할거냐구요? 같이 살아야죠. 어째요. 제가 한 가지 사실을 알아버렸거든요. 제가 와이프를 무지하게 사랑하고 있더라구요. 평생 견뎌야 할 아픔보다 조금 더 많이 아내를 사랑하고 있더라구요. 이건 뭐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건 아닙니다. 20년 살아온 정일 수도 있고 한달 뒤면 후회할 감정적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와이프의 치밀한 가스라이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이번 설에는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고 제주도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4박 5일로 조금은 길게 잡았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표가 2월 3일 밖에 없더라구요. 그냥 아내, 두 아이와 함께 맛있는 거나 먹고 오려구요. 그래서 펜션 대신 리조트로 숙소를 정했습니다. (실제로 다녀왔습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가끔은 좋은 데도 가보고. 그래서 조금은 치유가 될까요? 털끝만큼의 기대도 없습니다. 여전히 내 아내를 물고 빠는 그 놈의 영상이 저를 따라다닐겁니다. 때로는 분노가, 때로는 절망이, 때로는 수치심이 저를 사로잡을 겁니다. 어떻게 제가 그 일을 잊을 수 있을까요? 원빈보다 잘 생겼다며 그 놈에게 매달리는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를 이혼으로 마무리하기엔 아이들이, 제 남은 인생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아내에게도 한 번의 기회는 주는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 겁니다. 용서는 기대도 안하고 견뎌보고자 했던 절박함에 아주 작은 마음 한 쪽을 주기로 한 겁니다. 다들 생각이 다르실 거에요. 제 베프처럼 이혼 말고는 답이 없다는 분이 더 많으실 겁니다.

 

감상에 빠져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욕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거 제 인생이잖아요. 어떤 식으로도 선택을 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1대1 피트니스를 받기로 했습니다. 돈도 더 많이 벌어보려구요. 그래서 이 상처가 절대 아물지 않을거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혼을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이게 잊혀지겠습니까? 지워지겠습니까? 그냥 저는 제 나름의 선택을 했을 뿐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씁니다. 그게 제가 앞에 쓴 글을 정성스레 읽어주시고 조언을 해주신 여러분을 향한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 제 앞으로의 삶에 최선을 다해 몰입할 예정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어떤 선택도 응원할께요. 함께 아파하고 응원하고 공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우리 삶에 앞으로는 행운만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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