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이라는 듣기 좋은 말 - 다섯 번째 이야기
그날은 대구 출장이 있었습니다. 기차편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내려가다가 아내에게 톡을 하나 넣었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하루 일정을 꿰고 있기 때문에 괜히 불안해집니다. 한 시간이 지나서 겨우 'ㅇㅇ'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현타가 왔습니다. 나만 애가 닳아 있구나, 바람 핀 쪽은 저쪽인데... 또 한 번 조급증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톡에다 대고 이렇게 쓰고 있더군요. 우리 참 안통한다, 내가 매달리는 것 같다 나도 예민해서 촉이라는게 있는데, 내가 니 맘에 없는 것 같다,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 솔직하자, 애먼 사람 붙잡기 싫다...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공감하실 거에요.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기분, 아니 순간순간 달라지는 내 안의 변덕, 이 얘기를 들은 와이프가 소주 한 병에 맥주 두 병을 깠더라고요. 바로 전화가 왔는데 미팅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이거 못 견디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쪽이 애를 써도 될까 말까 할 일인데...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이혼 이후의 삶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 수서역에 도착했습니다. 와이프에게 전화를 하니 굳이 나오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냥 집 근처 정자역으로 나와달라고 했습니다. 술이 꽤 취했는데도 배웅을 나오더군요. 어라...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인데... 음주운전자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힘든거 알겠는데, 아침 저녁 내 마음이 다르다. 곧 죽을거 같이 힘들다, 내가 겪어보니 바람 핀 여자랑 살 남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와이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주 두 병을 샀습니다. 와이프가 굳이 제육 볶음을 해주었습니다. 소주 한 병 반을 까고 나니 알딸딸해지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말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착한 거 같애. 근데 더 이상 착한 연기 안할라고. 이건 정말이지 진심이었습니다. 와이프 손목을 끌고 큰 방으로 왔습니다. 내 머릿속에 24시간 상영하는 야동이 돌아가고 있다. 내가 아는 와이프가 맞나 싶어 순간순간 절망하고 있다. 사랑했던 만큼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내일 또 이러지 않는다고 장담 못하겠다. 그래도 같이 살 용의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진짜로 그랬거든요. 변덕스런 나 때문에 와이프도 힘들겠지만 지가 저지런 짓에 비하면 조족지혈 아닌가요? 이런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헤어지는게 답이다 싶었습니다. 애들 걱정하다가 제가 먼저 죽어버릴 것 같더라구요. 아마 오늘은 제 목소리를 듣고 와이프도 놀랐을 겁니다. 이상하게, 독한 마음 먹으니 마음이 좀 낫더라고요.
또 하나의 깨달음이 왔습니다. 나 이제까지 너무 착하게 살은거 같아, 이제 그거 안하려고 그런 마음으로 차분하게 몇 마디를 했습니다. 무슨 말 끝엔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이제 노예로 살겠다고요. 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바람 핀 여자를 두고 갈팡질팡 하는 소심한 남자입니다. 쓸데없이 착해서 바람 핀 여자 앞에서도 전전긍긍하는 갑갑하기 짝이 없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조바심에 착한 남자로 응대하니 와이프가 오히려 당당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매달리고 있더라고요. 가정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아니 그보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불을 켜는 이혼남... 그게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던 아닌지, 하지만 이제 그 마음을 접었습니다. 나쁜 남자로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와이프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최소 몇 달은 당신 마음 고생할 거다, 힘들거다. 그래도 나랑 살 자신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겠다고 하네요. 완전히 꼬리 내린 모습을 보니 또 한 번 짠한 마음이 입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나도 모르게 와이프를 안아주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내 품에 안긴 와이프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착한 남편은 죽어버렸다고, 너도 이제 죽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둘이 함께 죽지 않으면 이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합니다. 과거의 아내에 대한 기억이 저를 죽이고 있더라고요. 내 여자가 그럴리 없는데, 얼굴도 모르는 젊은 놈에게 넙죽 아랫도리를 내줄 여자가 아닌데, 그러니 더 미치고 환장하겠는 겁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번복할 길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럴 땐 세상 나쁜 남자가 되어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폭력을 행사하겠다는게 아닙니다. 그냥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못 견디면서 저랑 살 수는 없습니다. 그제서야 솔직히 이실직고 하더군요. 세 번 만났다고요. 미친 *입니다. 고3인 아들에, 파킨슨에 대퇴부 골절로 쓰러진 장인을 두고 칠렐레 팔렐레 행복하게 그 놈 아랫도리로 뛰어든 년입니다. 그런 여자를 데리고 살겠다고 허세를 부린게 바로 저입니다. 하지만 그 허세를 부린 것도, 현타를 맞고 비틀거리는 것도 바로 저입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이 글을 씁니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봅니다.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년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 아뜩하기만 합니다.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우소인 이곳에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입니다. 어차피 해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답도 지옥이란거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그럼에도 제가 이곳에 제 감정을 꺼내놓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글을 쓰면 꽤나 위로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제발 함부로 재단하지 마세요. 그냥 공감해주시거나 공감이 안되면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저랑 비슷한 지옥을 경험하고 계시다면 제가 쓴 글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만 찌질이 아니에요, 호구 아닙니다. 세상 못난 놈이 여기 또 한 놈 있습니다. 하지만 목에 힘 주고 베짱으로 나갈겁니다. 나쁜 남자로 살겁니다. 함께 살든, 못참고 갈라서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십시요. 저는 반드시, 기필코 행복해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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