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이라는 듣기 좋은 말 - 여섯 번째 이야기
30년 지기 베프가 한 명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이건 아닌 것 같다'며 이혼하라고 합니다. 저를 위한 말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전문 상담가의 유튜브 영상을 소개해 준 것도 이 친구니까요. 그날 내 얘기를 듣고 밤새 영상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도, 그 친구도 최근엔 어떤 톡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심각하고 디테일합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낯선 남자를 만나도 평소 즐겨 보던 매불쇼에서 바람피운 남자 얘길 들어도, 공항에서 내 앞에 앉은 젊은 남자의 넓은 어깨를 보아도,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아도, 호텔방에 베게를 베고 누워도 그놈의 얼굴이, 몸이, 그리고 뒤엉킨 아내의 모습이 연상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내 생각이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 와이프가? 그럴 리 없는데?"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과연 아내는 이런 내 마음을 짐작이나 할까요?
비행기 속 아이들 사이에서 아내가 손하트를 날립니다. 여행 당일 아내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 아내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따로 전화를 하겠다고 자릴 비웁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혹시 상간 놈이랑? 파킨슨에 대퇴부 골절로 쓰러지신 장인어른이 계십니다. 장모님과 그 얘기를 오래도록 나누고 있는 와이프를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아마도 이런 의심은 순간순간 떠오르겠지요. 많은 분이 시간이 약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그럴 거라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지금 놀람과 절망과 좌절과 수치스러움은 1월 9일의 그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2년? 3년? 아니면 5년이 지나면 이 마음이 조금은 옅어질까요? 하지만 그사이에 또 어떤 트라우마가 저를 사로잡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네요. 오직 견디는 것 외엔 따로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고이 가방에 넣고 마지막 의지로 삼습니다. 새벽 3시 50분, 숙소는 조용합니다. 코를 심하게 고는 저 때문에 방을 2개 잡았습니다. 나 홀로 빈방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모텔방에서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애를 쓰면서요.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아내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아내 특유의 체취, 긴 손가락, 가는 손목을 그리워합니다. 내 품에 가득 안고 흠씬 아내의 냄새를 콧속 깊이 들이마시고 싶습니다. 지독한 미움보다 0.5그램 무거운 사랑의 무게가 이번 제주 여행을 결심케 했습니다. 나는 과연 잘하고 있는 건가요? 이 선택, 이 결정이 현명한 것일까요? 친구 말대로 더 단호했어야 했을까요? 티 없이 맑고 조용한 제주도의 새벽이 깊어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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